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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 : 일중 김충현
한국 서예계의 큰 어른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씨가 19일 오후 8시 별세했다. 향년 85세.
1921년 서울생인 김충현씨는 1938년 중동학교 재학 때 조선남녀학생작품전에서 최고상을 받으면서 일찍부터 서예계에서 이름을 알려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1903-1981)과 나란히 해방 후 한국 서예계를 이끌었다.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 등 고인의 친동생들도 우리 서예계를 이끄는 대가들이다.

고인은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경동고 교사, 1957년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 1974년 한국서예가협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1981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고 1983년에는 인사동에 백악미술관을 건립했다.

고전을 따르면서도 개성적인 그의 글씨체는 ’일중체’라는 독자적인 서체로 인정받았으며 해서를 기본으로 하는 반듯한 글씨체는 대중적으로도 사랑받았다.

경복궁의 ’건춘문’현판, 남산의 안중근 동상과 충무공 기념비 글씨, 탑골공원의 3.1정신찬양비문,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묘비 글씨, 삼성그룹 옛 로고인 한자 ’三星’, 아모레퍼시픽의 상표 ’설록차’ 글씨 등 친숙한 비문과 현판, 상표 글씨들을 많이 남겼다.

고인은 한문 뿐만 아니라 한글 글씨에도 애정을 쏟아 ’우리 글씨 쓰는 법’, ’국한서예’, ’한글 서예’ 등 한글서예 교본을 여러 권 펴냈고 한글 궁체를 정립하는데 큰 몫을 했다. 1990년대말부터 파킨슨병을 앓아 활동을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예술원상, 보관 문화훈장, 춘강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송용순(85)씨, 아들 김재년 코리아 에어텍 사장, 딸 김단희(서예가), 김봉희씨가 있다.
작가명 : 하촌 유인식
원로 서예가 하촌(夏村) 유인식씨(84)가 6월1일까지 서울 정동경향갤러리에서 회고 초청전을 갖는다. 중동고교 64회 제자들이 당시 국어 교사였던 하촌을 초청해 회고전 식으로 여는 ‘사은전’이다. 그의 인간적인 멋과 선비정신이 느껴지는 정경이다.

하촌은 현대 한국 서예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검여(劍如) 유희강(1911~76)의 제자로 행서에 뛰어난 서예가다. “얌전하고 아름답지만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글씨”(서예평론가 정충락)라는 평을 받는다. 구작과 신작을 합쳐 60점을 발표한다.

글씨만 쓰는 것이 아니라 시도 자작한다. 국한문, 또는 한문으로 시를 지어 자기 소견을 밝힐 수 있을 만큼 글을 즐긴다. 서단의 중진인 조창래·이흥남씨 등이 하촌의 제자다.
작가명 : 검여 유희강
인천이 낳은 국보급 서예가 검여 유희강의 서거 30주기를 맞아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전시와 심포지엄이 열린다.

인천문화재단(대표이사 최원식)은 오는 11월 6∼16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중앙전시실에서 '검여 유희강 서거 30주년 기념 특별전'과 11월 11일 오후 12시 30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학술심포지엄을 연다고 19일 밝혔다.

검여 유희강(1911∼1976)은 청년시절 중국 상하이에서 동서고금의 예술적 정수를 섭취하며 서구 추상화로부터 정통 서예에 이르는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펼쳐왔으나 지난 198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시를 빼놓으면 이렇다 할 조명 작업이 뜸해 대중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갔다.

이는 그의 삶이 다른 예술가들보다 특별히 불우했다거나 예술적 성취가 남다름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거나 하는 흔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근대 이후 한국사회의 다른 많은 분야들이 그랬듯 한국미술도 서양미술에 점차 자리를 내주게 됐고 그 중에서도 한자문화권 고유의 예술장르인 서예는 더욱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일반에 서예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정도에 불과할 만큼 오늘날의 서예는 변두리 장르가 되버린 것이다.

그러나 유희강은 '칼날 같다'는 의미의 아호 '검여'와도 같이 다양한 서체들을 두루 능숙하게 구사했고 자로 잰 듯 당차게 뻗어나간 호와 획으로 정평이 난 천재 서예가였다.

또 서양의 쇄도와 동아시아의 응전이라는 근대적 구도 속에서 그는 동서를 넘나들며 고금을 아울렀던 미학적 천재였으며 한국화에 서양회화 기법을 도입해 우리 그림의 현대화를 앞장 서 일구었던 선구자이기도 했다.

인천문화재단은 지난해 한국 최초의 미학미술사학자인 우현 고유섭을 인천대표인물조명사업에 첫 대상자로 선정한 데 이어 올해 검여 유희강을 인천대표인물로 선정했다.

검여에 관한 자료를 취합하고 지워진 그의 생애를 복원하는 작업은 인천문화재단이 맡았고 전시기획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의 이동국 학예사와 한국학대학원의 이완우 교수가 맡아 준비 중이다
작가명 : 소전 손재형
소전 손재형은 1903년 전남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향저에서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손(孫)이자 영환(寧煥)의 유복자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이고 아명(兒名)은 판돌(判乭)이며, 아호(雅號)는 소전, 전옹(翁),전도인(道人) 등이며, 당호(堂號)는 옥전장(玉田莊), 봉래제일선관(蓬萊第一仙館), 존추사실(尊秋史室)등을 썼으며 이 밖에도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쓰셨으며, 추사 이래의 대가로 추앙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서예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면서 한자 문화의 정수인 서예를 오늘날에 이어 온 서예계의 거목이다.  

  당시 3천석군을 자랑하던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는 5살 때부터 할아버지인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으니 어릴 적부터 서예에 남다른 재질을 가졌다. 독창적 서체를 개발한 업적을 남긴 소전을 가르켜 흔히 앞으로 1세기 안에 나타나기 힘든 서예가라는 말을 한다.  

  1924년(당시 22세)부터 1931년까지 매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제 1회 조선서도전에서 특선하는 등 나이 30전후에 특선을 마치고 곧 이어 국내 규모의 심사위원을 맡아 국전이 시작되면서 계속해서 9회나 단 한번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홉차례 심사위원을 지낸 뒤에는 두차례에 걸쳐 국전 고문을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장 한번, 국전 운영위원장 두 번, 예총회장 두 번, 대한민국예술원회원(’54~’81) 등을 지내 그가 활동하던 40년간 선전이나 국전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때가 없었다는 것은 앞으로 그 기록이 좀처럼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다.  

  일제시대 말기에 이르러서 우리 국어는 말살 당하고 민족문화로서 민족서예는 그 존재성마저 잃게 되었으나 8ㆍ15해방을 맞으면서 소전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 서예로 할 것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불쾌한 기억을 씻어 보자는 의미도 있지만 동양적 서예관에서 서즉화(書卽畵), 화즉서(畵卽書)라는 전통적 의미와 함께 현대의 예술성을 띄고 새로운 서예운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민족적 의지의 표징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서예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1945년 조선서화 동연회(同硏會)를 창립 선전이 없어진 문화적 공백기를 메웠으며 그것이 국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흔히 소전을 서예가로만 인식하지만 학남(鶴南), 산정(山亭)같은 제자들은 『선생님이 남긴 80여점 중에는 선생의 글씨보다 더 높이 평가할 그림이 있다.』고 화가로서의 소전을 평가한다. 장년기에 들어 소전의 글씨는 더욱 원숙해졌다. 자획과 구성에 무리가 없고 문기가 넘치는 그의 글씨는 보는 이의 저항감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데 특색이 있으며, 수차에 걸쳐 중국에 다녀와 중국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이른바 소전체라 불리는 서체를 만들어 냈다.  

  특히 극치를 이룬 것은 1956년 고향인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ㆍ한문 혼용비인 이충무공 전첩비문이다. 점, 선, 횡획, 종획 등의 변화무쌍한 조화를 이루며 전체적인 리듬이 금세의 역작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선생의 재질과 노력이 민족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어울려져 결집된 소전예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대표작으로 진해 해군 충효탑 비문(예서체), 서울 사육신 비문(육체) 등이 꼽힌다. 그 외에도 의암 손병희 선생 묘 비문, 안중근 의사 숭모비문, 육군사관학교의 화랑대, 불국사 관음전 현판 등이 있으며, 출품 작으로는 “애착춘산병” “임지여묵” “곡병일대” “대연” “人言” “行書一對” “筆硏精良人生一樂”등이 있으며, 제4대 민의원 의원과 제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는 제자를 사랑했다. 그가 길러 낸 제자들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등 한국 서예의 기둥들이 즐비하다. 구철우는 『우리나라 서예가들 두어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의 제자라고』말하였다. 해학이 넘쳐흐르고 많은 사람을 웃기면서 사귀는데는 천재란 평을 받는 소전은 예술에 대한 고집은 대단해서 종종 적을 사는 때가 있었다. 그는 예술가의 기본적인 인간성과 생활태도를 중시해 『멋과 풍류도 좋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축첩은 삼가자』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글씨를 대부분 새벽 4시에 일어나 쓰는 정성을 들였으며, 『역시 글씨는 마지막 10%가 신운(神韻)이다』고 곧장 말하면서 기분 내키지 않는 때면 수없이 썼다가 찢어 버리고 낙관을 않는 성미였다.  

  서울 홍제동에 세운 그의 집은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던 해 착수했다. 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사랑채를 사들여 옮겨 짓고 옥전장과 문옥루 등은 33년전에 지은 효자동의 그의 집을 옮겨 왔다. 소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이 집을 예술의 정수로 완성하려 하였으나, 16년간이나 계속하고도 완성하지 못한 채 병석에 쓰러지더니「소전체」를 확립한 추사이래의 대가 소전은 1981년 79세의 나이로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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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美的 感覺으로 創造的技倆을  발휘 작품世界

첫째, 궁체, 판본체에 의존해 오던 우리 한글 書藝를 現代的 感覺으로 새롭게 조형 한글 書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며

둘째, 문인화에서도 四君子, 소나무, 포도, 연, 怪石, 글방그림 등 다양한 소재를 自由自在로 구사했는데 모두 氣韻이 生動하고 淸楚澹泊한 作品들로 그 境地와 文氣가 높고 脫俗하여 볼수록 好感이 가며

셋째, 中國 書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他 장르보다 輕視하는 風潮 속에서 뛰어난 창의력과 실험정신으로 몇 가지 書體를 한데 모아 書의 새로운 造形을 추구하여 中國 書藝의 모방에서 완전히 탈피 創造的이고 個性이 넘쳐 어느 書體 할 것 없이 才氣와 멋과 諧謔이 共存하는 秀作을 많이 남겨 後學들의 本이 되었다
작가명 : 오 창 석
중국 근대(1840년~1919년)에 활동한 오창석 은 평생을 시, 서, 화, 인 등 각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전각 에서 시작해 서법을 익히고 최후에 회화를 성취했다. 오창석은 회화에서 절파 를 배우고 중년 이후에는 진, 한대의 법식을 익혔다. 소나무, 수선, 목단, 기타 잡훼 등에서 제재를 취한 화훼화와 산수, 불상, 인물 등을 모사했는데 작품에는 커다란 바위, 제발, 인장과 화훼 등이 서로 호응하며 어우러져 화면 전체에 유기적인 조화를 조성했다. 묵법은 농담과 간습(간습:먹이나 안료의 물기가 적고 많음)이 적절하고 대상의 내재적 기질과 생명력의 표출에 탁월했으며 형사를 초월하는 운치의 전달력이 뛰어났다. <황산고송도>는 오창석의 나이 71세때인 1915년에 그린것으로 중량감이 넘치는 근경의 묘사와 원산(遠山)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 활달한 필선의 움직임과 짙은 먹색의 활용이 작가의 독자적인 품격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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